제5장
낯선 동거인
결과를 듣는 날에는 아내가 같이 진료실에 들어갔습니다. 혼자 들어가겠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꿨습니다.
결과를 듣는 날에는 아내가 같이 진료실에 들어갔습니다. 혼자 들어가겠다고 했다가 마음을 바꿨습니다. 저는 긴장하면 들은 말의 절반을 잃어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은 절반도 집에 오면 조금 바뀌었습니다.
의사는 영상을 보여 줬습니다. 저는 화면 속에서 제 췌장을 찾으려 애썼습니다. 자기 집 사진을 보고도 현관이 어디인지 모르는 기분이었습니다.
췌장에는 염증과 관련해 살펴봐야 할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전 증상과 검사들을 함께 검토하고 필요한 추가 확인을 거치면서, 의료진은 만성 췌장염에 해당하는 변화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원인은 더 확인하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는 한 번의 숫자와 한 장의 사진보다 많은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저는 결과를 듣는 자리에서는 그 과정이 다 압축되어 짧은 병명 하나로 들렸습니다.
“췌장염이군요.”
제가 말했습니다.
의사는 급하게 치료가 필요한 악화 상태인지와, 만성 췌장염으로 앞으로 관리하고 추적할 부분을 구분해 설명했습니다. 그날 제 상태에서는 계획을 세워 외래 진료를 이어 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만성’이라는 말을 덜 위험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려다가 설명을 다시 들었습니다. 심한 급성 췌장염을 운동으로 버티자는 뜻도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저는 위험하다는 말만 들으면 바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외래로 본다는 말을 들으면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판단은 늘 양쪽 끝을 오갔습니다.
혈당과 당화혈색소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습니다. 추가 확인 결과 당뇨 치료가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췌장 질환과의 관련성은 내분비 진료와 함께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허리둘레와 식사 기록, 이후의 체성분·근력 및 영양 평가에서는 또 다른 과제가 나왔습니다. 저는 체중만 보고 안심했지만 복부 지방은 줄일 필요가 있었고, 근육은 더 잃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습니다. 그때 평가에서 뚜렷한 영양실조가 확인된 것은 아니었지만, 소화와 영양 상태도 계속 살펴야 했습니다.
“몸무게는 그렇게 많이 나가지 않는데요.”
제가 말하자 의료진은 체중 하나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배 모양만으로 내장지방을 진단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췌장염의 원인 역시 그 체형 하나로 정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새로 배운 사실을 바로 극단적인 결론으로 바꿨습니다.
“그러면 일단 많이 빼야겠네요.”
“만성 췌장염이라서 무조건 감량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양이 부족해지는 분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복부 지방을 줄이되, 근육과 필요한 영양을 지키는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저는 줄이라는 말만 들을 준비를 하고 왔는데 지키라는 숙제까지 받았습니다. 췌장은 단순한 업무 요청을 해 주는 부서가 아니었습니다.
췌장은 소화를 돕는 일도 하고 혈당 조절에 필요한 호르몬을 만드는 일도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한 부서에서 두 가지 핵심 업무를 맡아 왔다는 말을 듣고, 췌장에게 처음으로 동료애를 느꼈습니다. 회사에서도 그런 부서는 대개 인원이 부족했습니다.
그런데 제 동료는 몸 안에 한 개뿐이었습니다.
진료실을 나오며 저는 종이를 한참 내려다봤습니다. 병명과 다음 예약이 적혀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이름 없이 일하던 장기가 갑자기 제 생활의 주요 안건이 됐습니다.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아내가 물었습니다.
“무슨 생각 해?”
저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췌장한테 좀 화나.”
아내는 저를 봤습니다.
“걔는 당신한테 안 화났을까?”
저는 한동안 말하지 못했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지면 장기가 화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 질문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같은 몸에서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췌장이 없는 것처럼 살았고, 이제야 낯선 동거인처럼 대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와서 약 봉투를 식탁에 놓았습니다. 앞으로 밥을 먹을 때마다 눈에 띌 자리였습니다. 아직은 그 풍경이 몹시 낯설었습니다.
COMMENTS · 제5장
낯선 동거인 댓글 0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읽다가 궁금한 점이나 보탤 내용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