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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췌장 귀하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저는 마흔일곱 살, 개발 경력 이십삼 년의 프로그래머입니다.

마지막 수정 2026-11-06 · 책으로 읽기

췌장 귀하.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저는 마흔일곱 살, 개발 경력 이십삼 년의 프로그래머입니다. 다른 회사의 업무 시스템이 어디에서 막히는지는 꽤 잘 찾으면서, 귀하가 제 몸 어디에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고 살았습니다. 대단히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도 연락이 뜸했던 사이입니다.

식사를 하면 누군가 소화를 돕고, 하루가 지나면 누군가 혈당 조절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략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누군가가 늘 성실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제가 밤늦게 뭘 먹든, 잠을 어떻게 자든, 귀하는 정해진 자리에서 알아서 일할 줄 알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상당히 무례한 고용주였습니다. 정식으로 채용한 것도 아니면서 평생 근무를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몸의 모든 일을 관리할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르는 것이 많고, 몰랐다는 사실도 늦게 알았습니다.

검진표에 귀하의 이름이 등장한 뒤 저는 몹시 놀랐습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감사 인사가 아니라 인터넷 검색이었습니다. 제일 많이 한 일은 걱정이었고, 제일 빨리 세운 것은 무리한 계획이었습니다.

제 팔다리는 비교적 가늘고 배는 먼저 출근한 사람처럼 앞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체중이 별로 늘지 않았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지 단추가 다른 의견을 냈지만, 저는 세탁 과정의 문제로 처리했습니다.

곧 매일 두 시간씩 걷고, 먹는 것을 완벽하게 고르고, 다시는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계획표를 만드는 동안 간식을 찾았다는 사실은 일단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이미 아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 뒤에 벌어진 일들입니다. 병원에서 모르는 단어를 배우고, 냉장고 앞에서 오래된 핑계를 듣고, 가족에게 도움을 받으면서도 괜히 짜증을 내고, 운동화 끈을 묶었다 풀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만성 췌장염과 당뇨를 진단받은 뒤, 배만 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제가 근육과 영양까지 챙기게 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프로그램은 급하면 이전 버전으로 되돌렸지만 몸에는 어제의 저를 불러오는 버튼이 없었습니다.

대단한 승전보는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검사 결과가 예뻐지고 약 봉투를 멋지게 버리는 장면도 없습니다. 대신 내일 진료에 갈 수 있게 예약을 기억하고, 오늘 몸 상태를 설명하고, 필요한 치료를 받는 사람이 조금씩 생깁니다.

처음에는 귀하에게 싸움을 걸었습니다.

지금도 제목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누구와 어느 편에서 싸우는지는 이야기 끝에 가서 다시 정해 보겠습니다.

우선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검진표를 들고 병원 예약부터 하는, 아주 평범하고 조금 소란스러운 저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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