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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검진표

저는 이십 년 넘게 오류를 잡으며 살아온 프로그래머입니다. 기업 업무 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일을 합니다.

마지막 수정 2026-11-06 · 책으로 읽기

저는 이십 년 넘게 오류를 잡으며 살아온 프로그래머입니다. 기업 업무 시스템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일을 합니다. 서버에서 경고가 뜨면 새벽에도 일어납니다. 제 몸에서 경고가 뜨면 일단 잡니다. 자고 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회사에서는 이런 대응을 무책임하다고 부릅니다. 집에서는 피곤해서 그렇다고 부릅니다. 둘 다 제가 하는 말입니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일 년에 한 번 성적표를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선생님이 너그럽기를 바라는 학생의 마음입니다.

전날 저녁에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밥을 먹었습니다. 이것으로 지난 일 년의 야식이 어느 정도 정리되기를 기대했습니다. 몸도 오래 같이 살았으니 제 사정을 좀 봐줄 거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몸은 그런 거래를 받아 준 적이 없는데, 저는 해마다 시도했습니다.

체중은 몇 년째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건강도 비슷할 줄 알았습니다. 팔다리는 가늘고 셔츠 안쪽의 배만 조금씩 자랐지만, 저는 그 정도를 중년의 기본 사양이라고 불렀습니다.

검진실에서 허리둘레를 재는 직원이 줄자를 다시 정리했습니다. 저는 괜히 배에 힘을 줬습니다. 숨을 편하게 쉬라는 말을 듣고 놓았습니다. 제 몸에서 가장 솔직한 부분은 배였고, 저는 자꾸 그 진술을 방해했습니다.

검진을 마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밥집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아침 한 끼를 굶었다는 이유로 점심 두 끼 분량을 주문했습니다. 밥을 먹으면서 올해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생각은 늘 공짜였고 대체로 제 편이었습니다.

며칠 뒤 병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검사 결과 설명을 들으러 오셔야겠습니다.”

목소리가 차분했습니다. 저는 그 차분함을 좋은 신호로 받아들였습니다. 나쁜 소식이라면 조금 더 급하게 말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병원 직원이 결과에 따라 성우처럼 목소리를 바꿀 이유는 없습니다.

의사는 검진표 한 곳을 가리켰습니다.

“아밀라제가 올라가 있습니다. 혈당 관련 수치도 높고요. 췌장 문제를 포함해서 원인을 확인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저는 처음 듣는 단어를 만났을 때 쓰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고개는 이해한 사람처럼 끄덕이고, 머릿속에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표정입니다.

“췌장염이 의심되는 건가요?”

“가능성을 봐야 합니다. 이 수치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큰 병원 소화기내과에서 진료를 받아 보세요.”

큰 병원이라는 말이 귀에 남았습니다. 작은 문제는 작은 병원에서 끝날 것이라는, 의학과 상관없는 제 나름의 분류법 때문입니다.

저는 처방전도 아닌 의뢰 서류를 받아 들고 나왔습니다. 종이는 가벼웠는데 가방은 무거워졌습니다.

집에 가서 아내에게 설명했습니다.

“췌장을 한번 봐야 한다네.”

“언제 예약할 건데?”

“일정 보고.”

아내는 제 달력을 보지 않고 저를 봤습니다.

“몸이 당신 일정 기다려 준대?”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회사 일정에는 한 달 뒤 회의까지 적어 놓으면서, 제 몸에 관한 일은 늘 시간 날 때 할 일이었습니다.

그날 밤 지역 대학병원 예약 화면을 열었습니다. 소화기내과라는 글자를 누르고 나니 여러 의사의 이름이 나왔습니다. 회사에서는 낯선 프로그램도 어떻게든 만져 보는 제가 병원 화면 앞에서는 아주 순한 사용자가 됐습니다.

예약을 마치자 문자가 왔습니다. 날짜와 시간, 준비할 서류가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문자를 세 번 읽었습니다.

췌장이 어디쯤 있는지도 자신 없던 사람이, 이제 췌장 때문에 휴가를 내야 했습니다. 회사 시스템의 점검 시간은 미리 확보하면서 제 몸의 점검 시간은 아직 달력에 없었습니다.

그날 배달 앱은 열지 않았습니다. 아직 결심을 한 것은 아닙니다. 걱정이 입맛보다 조금 빨랐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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