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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자, 췌장아내일의 산책

제24장

내일의 산책

병을 알고 나서 모든 것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 수정 2026-11-06 · 한 번에 펼쳐 읽기

병을 알고 나서 모든 것이 좋아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먹고 싶은 것이 있고, 걷기 싫은 날이 있고, 검사 결과를 앞두면 검색창에 손이 갑니다. 회의가 늦어지면 식사와 약을 챙기는 일이 번거롭고, 다른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고르는 메뉴 앞에서 저는 조금 더 생각합니다.

그 번거로움이 매일 멋진 깨달음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대체로는 그냥 번거롭습니다.

저는 여전히 중년 프로그래머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오류 앞에서 이마를 문지르고, 퇴근 직전에 오는 수정 요청에 한숨을 쉽니다. 팔다리가 갑자기 운동선수처럼 바뀐 것도 아니고 배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다만 마른 편이라는 이유로 제 몸을 점검 대상에서 빼놓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몸이 보내는 불편함을 일정을 방해하는 소음처럼 여겼습니다. 지금은 무엇인지 들어 보려고 합니다. 혼자 병명을 맞히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때 설명하고 도움받는 쪽으로 말입니다.

인슐린을 쓰는 사람을 보면 더 이상 그 사람의 하루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술 이야기를 들으면 모든 췌장염 환자의 미래를 한 줄로 적지도 않습니다. 반대로 외래 진료 중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병이라고 여기지도 않습니다.

위험을 안다는 것은 매일 최악의 장면을 상상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제가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미루면 안 되는지 알고 있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저녁에 경수 선배에게 사진이 왔습니다. 여행지의 바다였습니다. 사진 한쪽에 물병과 가방이 보였습니다. 선배는 쉬었다가 숙소로 돌아갈 거라고 했습니다. 저는 좋겠다고 답했습니다. 걱정할 부분은 선배가 자기 계획 안에 넣어 두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주말 장보기 목록을 쓰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 항목을 적었습니다. 딸은 옆에서 과자를 하나 써 넣었습니다. 우리는 그 과자가 누구 것인지부터 확인했습니다. 가족 전체가 제 병명으로 식탁을 독점당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약을 챙겼습니다. 안내받은 계획을 확인하고 운동화를 신었습니다. 날씨가 괜찮았고 몸 상태도 무리 없는 범위였습니다. 오늘 걸을 길을 짧게 정했습니다.

딸이 따라 나왔습니다.

“아빠, 오늘은 고양이 있는 쪽?”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한 번 가 보자.”

아내도 겉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습니다. 거울 속의 저는 처음 운동화를 신던 날보다 특별히 강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신발 끈을 덜 망설이고 묶는 사람이 됐습니다.

밖에는 저녁 냄새가 났습니다. 누군가는 운동을 하고 누군가는 밥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남의 속도를 세지 않고 우리 걸음을 맞췄습니다.

공원 입구에서 잠깐 배 쪽을 내려다봤습니다.

처음에는 배신당한 줄 알았습니다. 제가 잘 살고 있는데 췌장이 갑자기 문제를 만든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는 전부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 생각 모두 혼자 떠들기에는 편했고 제대로 살기에는 너무 단순했습니다.

이제는 그 안에 오래 일해 온 제 몸의 일부가 있다는 정도를 기억하려고 합니다. 고칠 수 있는 것은 치료하고, 도울 수 있는 것은 돕고, 모르는 것은 물어볼 생각입니다.

내일 회사에서는 또 경고 메시지를 볼 것입니다. 저는 그 메시지를 확인하듯 제 몸의 변화도 확인할 생각입니다. 다만 몸을 프로그램처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은 조금 내려놓았습니다. 고장이 났다고 혼내기보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살피는 쪽으로 말입니다.

저는 작게 말했습니다.

“싸우자, 췌장아.”

아내가 옆에서 물었습니다.

“아직도 싸워?”

“이번에는 같이.”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딸은 무슨 팀 이름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잠깐 생각했습니다.

“우리 팀.”

딸은 그러면 자기도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지원 조건이 고양이 구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받아 주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걸었습니다.

오늘 산책을 마치면 집에 갈 것입니다. 내일은 또 내일 몸 상태를 보고 정할 것입니다.

그 정도의 계획으로도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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